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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 사무엘 교수의 본회퍼가 경험한 침묵의 하나님!“전광훈 목사가 이 시대 본회퍼가 되려면 북한으로 들어가야“
뉴스에이 이광원 | 승인 2019.06.25 17:09
정 사무엘 교수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총장직무대리
/사회복지학박사)
[뉴스에이=칼럼] 디 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그의 윤리신학에 있어서 말씀과 인격의 관계는 말씀의 현재화에 있다고 정의한다.
 
즉 본회퍼는 그의 논문「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에서 사회윤리를 설득하면서 사회참여와 변혁은 공동체 윤리를 통한 인격이라는 개념이며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설명하고 있다.
 
본회퍼의 책임윤리에 따르면 작금 한기총의 행보는 과격, 돌진과 같은 사회참여와 변혁에 치중하는 <개방성>의 성공을 과시하는데 있기는 하나 신앙본질의 희석과 교회변질의 수호를 위한 <폐쇄성>은 전적인 실패로 지적받을 수 있다.
 
상호보완의 부재와 교회의 모습을 떠난 편중지향적 한기총의 사회참여는 결국 한국교회 전체의 공신력마저 바닥을 치게 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하나를 잃고 열을 얻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열 과 더불어 자존심과 신뢰도마저도 통째로 잃어 버리게 하는 한국교회역사 최대의 참사와 상처를 초래하는데 기여하고 말았다.
 
본회퍼는 1513년 네널란드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가문에서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Bresl며)에서 출생했다.

의대교수였던 아버지 칼(Karl)과 목사의 딸인 어머니 파울로(Paula)의 경건한 성품을 소유자의 가정에서 성장한 본회퍼는 1927년 베를린대학의 라인홀트 제베르크(Reinhold Seeberg)의 지도하에 “성도들의 교제: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적 탐구(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 논문을 써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칼 바르트(Karl Barth)로 부터 ‘신학의 기적’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1929년 교수자격을 취득한 본회퍼는 1930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를 거처 1931년 독일로 귀국해 베를린대학교 신학부에서 25세의 청년 교수로 강의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신학적 고민자 본회퍼는 침묵할 수 가 없어 히틀러에 대한 항거를 시작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당연한 뜻으로 받아 들였다.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 탄생의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인도를 여행하면서 간디를 만나 비폭력을 배우길 원했고 1935년 고백교회 총회 산하 신학교의 책임을 맡았지만 1937년 케슈타포에 의해 신학교는 폐쇄당하게 된다. 이때 본회퍼는 최고의 작품인 「나를 따르라」(Nachfolge)를 집필하고 이후 1939년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sen)도 집필하자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와 폴 레만(Paul Lehmann)이 본회퍼를 초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독일로의 귀국을 결심하고 독일에 돌아와 1943년 1월 마리아 폰 베데미아어(Maria von wedeneyer)와 약혼하고 3개월 후인 4월 5일에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4월 9일 사형 당함으로 생을 마감 하게 된다.
 
중산층 출신인 본회퍼는 여름이면 별장에서 휴가를 즐겼고, 가정교사에게 특별 과외공부를 받기도 했고 가족소유인 음악연주장에서 가족 오라토리오를 연주했는가하면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등 최상의 경험과 경력을 소유한 학자였다. 그러면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아프리카와 인도 등을 여행하면서 세상의 견문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했고 세계1차,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죽음과 절망 그리고 아픔과 분노의 세상도 목도하고 자유와 죽음의 현실까지도 분명하게 경험했지만 자유와 희망의 나라 미국을 포기하고 전쟁과 죽음의 독일, 어두운 역사 속에 하나님이 고난 받는 현장, 독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본회퍼에게 조국인 독일에서의 하나님은 침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자신이 경험하는 고난과 역경 앞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신학자의 품위를 유지했다. 절망도 포기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의 신학을 통한 새로운 길을 추구했던 진정한 수도사의 결의와 삶의 응답을 보여준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한기총 대표가 이런 본회퍼를 자주 인용한다.
가끔은 <존웨퍼>라는 이름으로 언급하기도 하고 <본 훼퍼>라고 표기하는 오류로 보아 본회퍼를 띄엄띄엄 아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아마 정황상으로 보아 본회퍼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유는 그가 본회퍼와 동등 됨의 길을 자청하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그가 본회퍼의 길을 선택한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회퍼처럼 가면 된다. 자유대한을 포기하고 북녘 땅으로 가서 악의 세력에서 고난 받는 동족을 위해 싸우다 <옥중서간>을 집필하는 그런 선택이라면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용기가 있다면 최소한 본회퍼에게 치욕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침묵이 있음을 아는 일이 우선적 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침묵이 유효한 동안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소임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한기총 임원과 대의원들의 전광훈 대표회장을 향한 효도를 이쯤에서 정리 하는 것이 소임일 수도 있고 더 이상 본회퍼의 순교를 오염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단도 사명적 소임일 수 있으며 한기총의 목적인 총칙 3조, “교회의 사명 감당을 위해 연합”을 위한 회복운동도 최후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색지대를 서성이며 관계정리의 결단을 미룬다면 비겁한 목사로 한국교회의 증언을 피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지금 한기총 회원 목사의 정체성(identity)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 해산을 소리치는 세상의 아우성과 분노를 듣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종국에는 역사의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다. 침묵의 계시속에 세미한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기도의 타이밍을 맞춰야 할 때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악한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손히 낮추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할 때(역대하 7:14)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뉴스에이 이광원  lwk@new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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