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 꼭지로부터 휘휘영 다가 온 가을이 어느 새 내 작고 초라한 옥탑 글방 창문
앞에 성큼 다가섰다. 글방이래야 두어 평 남짓한 좁은 방이지만 책상에 앉아 북한
산을 조망하고 싶을 때 눈만 치켜뜨면 보이도록 만든 벽면전체 통유리창가에 서서
선한 가을빛을 본다.

수필가 남기수

며칠 전만 해도 천박하고 디룩디룩 살찐 여자의 둔부처럼 끈적였던 장마 가 서울도심을 구름으로 덮어 잿빛이었다.

그러던 두어 밤이 지난 오늘 아침엔 바람도 제법 건들거리고 바다 색깔 보다 더 짙고 그윽한 하늘이 북한산을 품어 안았다. 인수봉 바위덩이 마저 갓 물들인 옥색 옥

양목천을 널어 놓은 듯 눈부시다.

요즘 도심의 하늘, 특히 인구 천오백만의 서울도심에 이런 하늘 색깔을 보기가 그리 조련치 않은데, 가을은 이리도 찬란한 전위대를 앞세우고 이르다 때를 맞춰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창유리를 통과하며 걸러진 푸른빛 마저 아까워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녹차 향 보다 더한 진한 가을 숨결이 책갈피를 토닥인다.

아! 숨결 짙은 이 향내.
얼마만인가. 먹구름 끈적였던 날로부터 탈출한 것이.
가산 이효석은 가을을 작은 뜰에 떨어진 낙엽을 태우며 갓 볶아낸 진한 커피 냄새
라 표현 했다. 그 는 가을에야 삶과 생활의 보람이 생긴다고 했다, 또 새로운 삶의
의욕과 의미를 발견한다고 했다.

지금은 아직 낙엽을 운운 할 시간은 이르지만 가을을 저만큼 마중하는 무
렵 난 무엇으로 어떤 것으로 표현하면 좋을까?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사랑하다가 사랑을 잃고, 혼절하면서도 또 사랑을 하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는 어느 여인의 관용이 용해된 계절의 편린 앞에 우뚝 선 시간.
도시에도 산간에도, 내 팔딱이는 심장에도, 살면서 살아 온 탑 보다 더 길게 드리워진 고
뇌를 해산 시켜버리는 청조한 투명함으로 명명해야 좋을까?

투명하다는 것은 맑다. 순박하다, 순진하다, 불순물이 없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
어 인간의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게다.

내 젊었을 때는 열광 같은 햇빛이 좋았다. 쌍데리아 불빛 같이 찬란한 밝음이 좋았
다. 부글부글 일렁이는 불이 좋았다. 때로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찬미하기
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너무 뜨겁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투명하고 선
한 빛이 좋아졌다.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쓰지도 않은 투명한 결과물이 좋아졌다.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무정체주의는 더욱 아니었다.

가을은 어느 한켠으로 지우치지 않는 그리고 열과 냉이 합쳐 혼신을 다한 투명한
결과물 낳는 계절이 아닌가. 그래서 가을이 좋아졌다.

멀지 않아 들판은 황금빛으로 변하고 인간의 몸이 될 열매가 지천일 때 내 측근뿐
만 아니라 지워지고 또 그려지지 않았던 모두에게 관용하고 싶어지는 것이 이 계절
에 생각하는 진심이 아닐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가을의 감상인 것 같다. 그렇다
고 궁시렁 거리고 앉아 내 일상을 멀리 할 위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아침 해가 북한산 위에 올라 내 창문을 핥는다.
이럴 땐 모시발 같은 가을향을 마시며 햇볕 따스한 책상 모퉁이에 앉아 편지를 쓰
고 싶다. 앞만보고 살아 온 내 삶의 모순선 중에서 늘 같이 있어 소중함을 망각하
는 잔주름 늘어진 아내랑, 사춘기 시절 바다가 보이는 화실에서 아그리파 각상 뎃
셍에 몰두하든 단발머리 소녀에게도,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련한 그대
들 누구에게나 보내고 싶은 편지를 쓰고 싶은 거다.

이것이 시간속에 하나씩 굳어 가는 나이 탓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 것이라면
더욱 편지를 서야 하지 않을까.

이 선한 아침 가을빛을 마중하며 투명한 마음으로 말이다.

여행레저신문 남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