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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총, 총무, 사무총장단 영광야월교회, 염산교회 순교의 피흘린 현장 방문통합, 영광야월교회 성도 하나도 남지 않고 65명 ‘순교’ 단일교회 세계최대 순교지
이광원 기자 | 승인 2020.10.27 01:59
합동, 염산교회 3개월 동안 김방호목사와 가족, 장로 부부 등 77명 ‘순교’
“하나님!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아저씨들을 용서해 주세요”
 
[뉴스에이 = 이광원 기자] 한장총 김수읍 대표회장을 비롯 한장총 차기 대표회장인 김종준 목사(현상임회장)와 각 교단 총무, 사무총장 등은 함께 순교지를 방문한 현장에서 당시 살아남은 자의 증언과 영상으로 보면서 참혹했던 그렇지만 영광스러웠던 당시 상황을 들으면서 말을 할 수 없었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참혹 했던 상황에 대하여 이들의 중언과 자료를 보면서 순교를 하기 전 고통과 불안이 밀려와도 결국 순교도 하나님이 허락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대표회장과 상임회장 그리고 총무와 사무총장으로 구성된 한장총 방문단이 처음 찾은 곳은 통합측 영광 야월교회(담임 심재태 목사.원로 배길양 목사)였다.
 
야월교회는 현재 통합측 소속 교회로서 1908년 4월5일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시작 되었으며, 야월교회는 일제강점기에 농촌계몽을 활발하게 하며 애국운동과 신앙교육과 예절교육에 힘쓰며 지역복음화에 힘쓴 교회였다.
 
1950년 6월22일 상륙한 숫자미상의 공산군들로서 이들은 배를 타고 목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전북지방을 향해 항해하던 중 밀물에 쓸려 야월리에 상륙한 부대였다.
이들은 이곳에 머물다가 마침 여순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군 병력의 작전에 의해 거의 전멸 되었으나 살아남은 잔당이 옥실리와 야월리 뒷산으로 잠입하게 되었다.
 
이후 인민군과 함께 들어온 내무서원은 야월교회를 접수하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때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 후 산에 나무하러 갔던 사람이 부상을 입은 공산군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여 포위되었을 때, 마을 주민이 자수를 권유하고 설득하여 그를 체포하였는데 경찰은 그를 총살해버렸다.
 
이 사건 후 남아 숨어 있던 다른 잔당들은 동료가 총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되었고 신고한 사람이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야월 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중 6. 25 한국전쟁으로 야월리 마을을 점령한 공산당들이 양조장 집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교회당 뜰에 무릎을 꿇리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처형에 앞서 인민재판을 벌였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으로 이 악질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인민의 원수이니 죽여야 하지 않겠소..
 
그때 야월 교회 출신 성도 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흉년이 들어 어려웠을 때 쌀을 풀어 나눠주었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 사람을 상을 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이렇듯 공산군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여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있던 중 인천상륙작의 성공으로 1950년 9월 29일 국군과 유엔군이 목포에서 함평 영광을 수복할 때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국군을 환영하게 된다.
 
하지만 염산면과 백수면은 당시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이 남아 있었고 지역도 늦게까지 수복 되지못한 관계로 이들은 인근 산속에 은거하면서 국군을 환영한 교인들과 주민들에 대한 보복 계획을 세우고 결국 공산군들은 인민재판으로 처형을 시작하여 1950년 9월, 10월에 걸쳐서 야월 교회 전교인 65명 중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잔혹하게 학살하고 야월 교회마저 불타는 참상을 겪게 된 것이다.
 
당시 야월교회 교인들이 몰래 숨어서 예배 한다는 것을 알고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의 좌익 청년들은 밤에 몰래 모여서 예배하는 이들을 색출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교회로 모이게 했다.
 
이후 야월교회 전교인 65명은 염산 앞바다 갯벌에서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했다.
내무서원의 명령에 따라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순교자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는 공산군에게 “마지막 소원 두 가지만 들어달라”며 간절한 기도와 함께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그 자리에서 불렀다. 그들을 죽인 공산군은 “정말 감동적이다. 믿음이란 대단한 것”이라며 감탄했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전 교인 65명이 한명도 남김없이 산채로 매장 되거나 수장되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되어 순교를 한 점이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순교사건인 것이다.
 
이후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순교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동네사람들도 ‘교회에 가면 죽는다’고 두려워했고 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20여년이 지나서였다.

 
야월교회서 통합측 사무총장 변창배 목사의 사회와 야월교회 설명이 있은 후 최정봉 목사의 대표기도 후 한장총대표회장 김수읍 목사는 “제가 통합측 목사인데 야월교회 순교지는 저도 잘 몰랐다”면서 “다시 더 공부를 해야 하겠다. 하지만 순교의 현장에서 다시금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예수를 위해 흘린 피는 결국 열매를 얻는다는 것이다”며“우리 모두 순교의 신앙을 갖자”고 말했다.
 
두 번째 방문지인 합동측 염산교회(담임 임준석 목사)는 김방호 목사 담임목사와 가족 그리고 장로 부부, 집사, 청년, 소년, 소녀, 유아까지 3개월 동안 매일 때론 며칠 간격으로 한가족, 또는 집단으로 예수 믿는 다는 한 가지 이유로 공산군 잔당들에 의해 77명이나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10월 3일부터 염산교회 77명의 성도들이 3개월에 걸쳐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3개월 이라는 기간 중에 도망 갈수도 있었고 숨던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안과 떨림 속에서도 화를 당한 것은 목사는 성도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성도들은 목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이들은 신앙을 지키고 연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고통과 불안의 눈물이 아닌 기쁨으로 하늘을 보았다.
6.25 동란 때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퇴각하지 못한 공산당들이 교회당을 불지르고 교인들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가 하면 죽창으로, 몽둥이로, 칼로 찌르고 때려서 죽이는 참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염산교회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는데 이때 담임이었던 김방호 목사를 비롯하여 전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하였다.
 
공산 세력에 의해 원창권 목사가 사임한 후 생명의 위험이 있는 염산교회를 부임해 오는 목회자가 없었지만 김방호 목사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제3대 교역자로 부임해 왔다.
 
염산교회에 수난이 시작되면서 김동근 장로와 그의 아들 김형호 집사가 목선을 준비하여 피난을 권유했지만,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놔두고 목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하며 김방호 목사는 피난을 거부하였다.
 
공산당들에게 예배당을 빼앗기고 3개월 정도를 카타콤에서와 같은 은신 생활을 하는 중에 10월 7일에는 예배당이 불에 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아픔을 겪다가 미군 스파이로 몰려 지방 빨갱이들에게 붙잡힌 김 목사의 여덟 식구(김화순 사모, 아들 현, 정, 전, 완, 선웅, 손녀 연경)는 같은 날 모두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
 
김방호 목사는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그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두려움에 떨지 않고 찬송을 불렀으며, 공산당원들은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는 김 목사와 자녀들을 무지막지하게 몽둥이로 힘껏 내리쳤고 찬송을 부르면서 영광된 순교의 길을 갔던 것이다.
 
87년 고몽룡 성도(당시35세)가 김방호 목사의 순교한 때를 회상한 내용이다
“바로 아침이었죠. 내가 선창가로 나가 보니 김 목사님과 허상 장로님 두 분이 계셨어요. 내가 그분들께 인사를 하려고 하자 목사님은 나에게 눈을 끔뻑여 대며 모르는 사이처럼 하라는 시늉을 하셨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다칠까봐 그러신 거죠. 그날 저녁에 순교하셨어요. 그때는 신자들에게 주의를 줄 때였어요. 우리 교인들에게 모두 몸조심하라고 일렀지요.
그때 나도 교회를 다녔는데 술과 담배를 하고 성깔이 있어서 그들은 내가 진실한 교인인 줄을 몰랐죠. 그래서 피해를 면했지요. 아마 지금껏 살게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죠“
 
또한 김 목사의 장남 휼은 목포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기독청년연합회장’의 신분으로 활동하던 중 좌익에 있던 학생의 고발로 야산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허상 전도사는 1939년 일제 강점기에 시작한 염산교회의 초대 교역자로 교회를 섬겼다.
염산교회의 초대 교역자였던 허 전도사는, 그렇게 초대 장로가 되어 2대 원창권 목사와 3대 김방호 목사를 헌신적으로 섬겼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경건한 삶을 살던 중 1950년 10월 13일에 부인 이순심 집사와 함께 순교하였다.
 
노병재 집사와 3형제의 친족 22명이 순교했고 기삼도와 청년들이 순교를 했다.
목포성경학교를 다니며 주의 종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기삼도 청년은 외부 사정을 교인들에게 알려 주었으며, 늘 김방호 목사와 그의 가족들이 숨어 있는 옥실리와 설도를 왕래하며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설도에서는 국군환영대회를 위하여 태극기를 만들던 많은 청년들이 좌익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김옥자와 자매들의 순교 김만호 장로와 박귀덕 권사의 딸 4명(15살 옥자, 11살 금자, 9살 신자, 3살 미자)이 순교하였다.
 
이들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이었지만 단지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란 이유로 수문통에 수장을 당하였다. 열다섯 살 언니 옥자가 세 살배기 동생 미자를 등에 업고 금자, 신자와 함께 끌려가는데 어린 미자가 등 위에서 울기 시작했다. 이때 옥자는 우는 동생을 향해 “울지 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달래며 순교 현장으로 끌려갔다.
바닷가 수문통에 가서도 어린이답지 않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침착하게 “하나님!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아저씨들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순수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담대한 모습에 수장을 시키는 공산당원들과 이 일에 가담한 좌익세력들이 오히려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이때 한 사람이 대검으로 옥자와 등에 업힌 미자의 목을 쳐서 바다에 던져 버렸다. 물이 빠져나간 후에 세 살배기 미자가 언니 등에 업힌 채 둘이 다 목이 잘려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다.
 
네 자매의 어머니인 박귀덕 권사는 증언하기를 “아무 죄가 없지만 예수 믿는다고 죽였지요. 그때는 믿는 사람은 다 잡아다 죽잉께(죽이니까). 인공 놈(공산당)들은 믿는 사람이라면 제발로 여깅께(제일 싫어하니까), 죄 없지만 믿는 집 애기들이라고 다 죽였지요. 우리는 천국 간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가서 죽었단 소리를 들응께(들으니까)..... 등거리서 모가지만 없어. 말도 못해라우(못해요). 못 죽으니까 살았제(살았지)”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즈그(그 애들은)는 천국 갔을 것이요” 라고 말하였고 박권사는 2년전 하늘나라로 아이들을 보러 간다고 말하고 소천 했다.

 
염산교회 도착 후 염산교회 담임 임준석 목사의 당시 상황과 영상을 보고 난후 합동측 최우식목사의 사회와 이승진 목사의 기도 후 합동측 직전 총회장인 김종준 한장총 상임회장은“합동교단은 장자교단으로서 이렇게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밑바탕에 세워진 교단에 대한 자부심도 가지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긍지를 가지고 사역을 하고 있다“면서“총회 차원에서는 순교한 교회를 역사적으로 보존하고 후원하고 있다”고 말하고“이렇게 우리 교단의 가장 자랑스러운 염산 교회를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고 말했다.
 
참석한 한 목회자는 “교회를 들어가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 나왔다”면서“또한 당시 상황을 듣고 있노라니 공산군의 잔악한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진정된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고, 그래도 순교자들이 한결같이 외쳤던 천국이 보인다, 자신들을 죽이는 공산군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목회자는 “코로나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분열이 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데 이곳에 와서 교회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산에서 굴에서 골방에서 드렸다는 말을 들으면서 한국도 이렇게 카타콤 같은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지금의 한국교회가 본질에서 마니 떠나서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국교회를 걱정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순교지를 방문한 윤은희 사모가 즉석에서 쓴 시  전문♡

글쓴이 : 윤은희사모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손길이

내 몸 구석구석까지
내 뻐마디까지
내 혈관까지
흘러넘쳐야만이
기쁨으로 찬양하며 순교할 수 있다

돌멩이가 날아와도
칼이 내 목을 쳐와도 
생매장을 당해도

천국 소망을  안고
무지갯빛 하늘을 바라보며 밝은 웃음
을 웃으며 떠날 수 있다

핏자국이 얼룩진 
그 곳엔 하이얀 들국화꽃이 피어나고

하이얀 종탑이 있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예배당이 그 자리에 
서리라
먼 훗날 그들의
후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와서 우리의
선배들이라 자랑스럽게 말하리라 

언제가는 우리 
믿는 성도 모두가
선배들의 뒤를
따라가리라

이광원 기자  newsa@new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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